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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행성 대관람차 - 곽재식 소설집 리뷰 "지나치게 현실적인 낭만"

by 칠월색 2020. 1. 9.

 

"내가 가족들 앞에 섰을 때, 한평생 유독 천천히 돌아가는 대관람차만 설계했던 그 노인은 해가 서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제 우리 같이 여기 앉아서, 지구가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고 말했다." - 행성 대관람차 중.

 

"140자 소설"에 이어 읽은 책은 같은 작가가 쓴 소설집 "행성 대관람차"다. "140자 소설"을 읽은 후에 이 책을 읽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집의 여러 소설이 140자 소설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140자에서와 기승전결은 같지만 그 사이에 위에서 말한 것 같은 현실묘사가 들어가기도 하고, 이 결말을 향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 궁금해져서 더 재밌었다. 특히 "천사가 앉았던 의자"는 그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천사를 찾는 과정과 주인공의 서사, 결말부분에서 주인공의 격한 감정묘사가 인상깊었기에 140자를 통해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지만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곽재식 작가는 주로 SF를 쓰고, 제목도 SF의 느낌이 강했지만 읽어보니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SF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른 SF, 그리고 SF가 아닌 소설로 이루어진, 생각보다 감성적인 책이다. 작가가 로맨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소설집 안의 "망했다"라는 소설은 평범한 학생의 평범한 낭만 안의 심리를 자세히, 낱낱이 밝혔다. 주말에 본 TV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대학생들은 낭만을 대학교 1,2학년 때 돌아다니던 캠퍼스, 풋풋한 CC, 이런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낭만의 아주 작은 조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학교 1,2학년 때의 어리숙함, 갓 성인이 되어 느끼는 자유로움, 취업 걱정 없이 대학을 휘저으며 느끼는 설렘을 낭만이라고 하기엔 너무 바쁜 대학생활을 보내서일까? 나는 오히려 학생 때 철부지처럼 친구들과 돌아다니던 추억, 대학교 3,4학년이 되어, 휴학 후 다시 돌아와 느끼는 편안함과 익숙함이 더 좋다. 긴 인생에서 그렇게 짧은 순간만을 낭만이라고 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망했다"를 읽으면서도 전형적인 낭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친구에게 꾀여 낭만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헛짓거리들은 결국 하나도 의미가 없는 일이 된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대학 생활의 환상과 현실을 섞는 것이라고 했다. 주인공의 머릿속, 친구의 말은 환상에 가깝고, 주인공에게 닥친 상황은 현실에 가깝기 때문에 결국 부조리극과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곽재식 작가의 특징인 생각의 흐름을 자세하고 논리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곽재식 작가의 특징 중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이다. 특히 올바르지 않은 행정 절차를 비꼬는 방식이 특출나다. 소설집의 거의 모든 글에 이 묘사가 드러나는데, 보통 소설의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주는 환경으로 나온다. 마치 악역처럼 주인공을 제한할 때가 많다. 이번 소설집의 소설 중 제일 제목에서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글인 "행성 대관람차"에서도 그렇다. 화자의 아버지가 대관람차를 설계할 때 안전하게 돌아가는 대관람차를 만드는 일만 잘하지, 경치를 보기 좋거나 스스로가 아름다운 미술품이 되는 대관람차를 만드는 일은 하지 못해 "싼 맛에나 일을 맡기는 업자"가 되어 여러 행성을 전전한다. 그런 내용을 읽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도 여태까지 읽어본 곽재식 작가의 다른 여러 글과 마찬가지로 블랙코미디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을 뒤엎고 잔잔하게 끝나서 더 큰 인상을 받았다. "다리 난간 위로 걸어가기" 또한 현실적이고 부정적인 묘사로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발견해서 남에게 그것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소설 창작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http://mirrorzine.kr/features/122019 ), 현실을 비판하는 면모를 보이다가도 그 현실 속의 낭만을 전달하는 것 또한 작가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소설집의 소설도 SF와 로맨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 미묘한 감성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2019년 9월 22일에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