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리뷰

by 칠월색 2020. 1. 9.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aladin.co.kr)

읽을 예정이 없던 책을 받았다. '중력'이라는 제목에 우주복 마스크를 쓰고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담긴 표지,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어느 샐러리맨의 감동 스토리'라고 적혀 있는 뒤표지의 소개문을 보면서 샐러리맨과 우주인의 연관성을 연결 지으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읽기 시작해보니 연구원에서 근무하며 우주인을 꿈꾸는 이진우가 주인공이었다. 결혼해서 자식이 있음에도 그런 꿈을 마음 한 쪽에 가지고 있다가 펼칠 기회가 생겼을 때 기꺼이 자신을 바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전에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꿈이랄 것 없이 다들 직장에 다니고, 힘들지만 꾸역꾸역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인생을 바칠만한 꿈이자 장래 희망은 없다. 우주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책 속의 인물들처럼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죽을 듯이 노력하는 건 나와 다른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대면하는 문제는 현실적이었다. 직장에서의 알력 문제로 대기반으로 발령이 나는가 하면, 우주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한다. '나는 과연 저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잘 대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더럭 날 정도로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거대한 파도에도 주인공은 당당히 맞서낸다. 나라면 그 파도를 대처 불가능한 주변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피하거나 굴복했을 것 같은데도, 인내하면서도 침착하게 내가 생각지 못한 제3의 해결 방법으로 대응하는 인물의 모습에서 배워가는 책이었다.

 

우주인 선발 과정을 자세히 쓴 것도 인상 깊었다. 실제와 얼마나 같을지는 모르겠으나, 잘 모르는 내가 읽으면서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름이 이소연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고 현실적이었다. 얼버무리는 부분 없이 구체적인 묘사는 가끔 지루해지기도 했지만, 소설이 수필이나 비문학으로 느껴질 정도의 현실감을 구현했다는 데에서는 점수를 주고 싶었다. 건강검진에 어느 절차가 있는지, 가가린 센터에서 어떤 훈련을 하는지, 심지어 휴식 시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까지 묘사한 것을 보고 나는 작가가 진짜 우주인 선발 과정을 거쳤던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상황 묘사뿐 아니라 인물 묘사에도 탁월했다. 독서 취향이 SF나 액션에 가까운 탓에 상황이 드라마틱해서 긴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으로 책을 마음 졸이며 읽게 된 적은 거의 없었기에 더욱 인상 깊었다. 인터뷰 형식을 취해 화자를 계속 바꿔 상황을 조망하고, 그러면서 상황의 윤곽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것은 소설에 나오는 우주인 선발 과정 관련 예능 방송을 보고 있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누가 최종적으로 우주인이 되었는가, 그곳에 가서 어떤 것을 했는가는 결국 아주 짧게 묘사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허무하지는 않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관찰하며 배울 것이 많았으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한 차례 큰일을 겪으며 깨달은 바를 책을 읽으며 같이 나눈 기분이었다. 의외로 성찰의 계기가 되어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책을 무작정 써 내려가는 데에서 시작했다는 점도, 책을 완성하는 데에 13년이 걸렸다는 점도 놀라웠다. 오히려 무작정 써 내려갔기에 더욱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갔다. 우리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뭐라도 좀 해보려고 한 발짝 씩 걸어가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고난이 있더라도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성장하게 되고, 지나면 결국 그것이 밑거름된다는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교훈을 줘서 내게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여성 우주인을 조명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이 딸을 묘사할 때 작가의 편견이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작은 불쾌감은 있었지만 여성 등장인물이 남자인 주인공의 여성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읽으면서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