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흰 - 한강 소설 리뷰

by 칠월색 2020. 1. 20.

'채식주의자'를 써 유명해진 한강 작가의 소설이다.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도, 장편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흰 것들을 소제목으로 한, 산문시로 느껴지는 짧은 글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한다. 옴니버스식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애매하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읽기 시작할 때는 각각의 글들이 소제목을 주제로 한 짧은 글조각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 수록 모든 이야기들이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감탄하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님에도 작가가 화자인 실화를 글로 옮겼다는 느낌을 준다. 라디오 방송을 하던 중 질문을 받았다고 시작하는 글이라든가, 엄마에 대해 얘기한 글들은 가상의 인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이것이 가상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녀는' 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듯 생생하여 '그녀'가 작가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알 수 없기에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에 찾아본 결과 이것은 작가의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언니가 살아있다면, 그에게는 흰 것만 주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온 소설이었다. 언니의 상황을 살아있는 듯, 아닌 듯 서술하여 실제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언니의 관점에서 적은 수필 같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책 사이사이에 담긴 일러스트는 채도가 매우 낮고 정적이다. 소설의 분위기 또한 그렇다. 매우 정적인 흐름은, 조용히 읊조리는 자장가 같기도, 조용한 첼로 선율 같기도 하다. '섬집아기'와도 비슷하다. 흰색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중에 조용함과 차분함, 슬픔을 가지고 작가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편하게 읽기에는 석연찮다. 심지어 이 책이 상당히 짧고 작은 데다가, 흰 공간이 검은 글씨에 비해 많을지라도. 읽는 중에도 짧은 책이라고 생각하며 빨리 읽으려고 애를 쓰게 되면서도 그럴 수 없음을 느꼈다. 그것은 자장가 그 자체보다는 엄마가 읊조리는 자장가,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한숨이 소설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내용에도 '엄마'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다. 화자의 엄마가 겪었던 힘든 일들이 담긴 과거와 자신이 지금 타지에서 살고있는 삶인 현재를 오간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나' 와 '그녀'와 '모든 흰' 세 부로 나뉘어 있다. 

 

이상하게 서평을 작성하기 어려웠다. 책을 읽을 때는 깊게 빠져 읽게 하면서, 읽고 나면 일상으로 다시 금방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다. 읽으면서는 이 책이 정말 깊은 인상으로 남아 계속 기억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흰 느낌만이 남는다. 찝찝한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다시 충실하게 만든다. 잔잔한 문체와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인상이어도 공포영화나 스릴러가 더 기억에 남고 밤에 누우면 생각나듯이, 이 책은 깊지만 내 근처에서 흘러갈 뿐인 강과 같았다. 작가의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그의 문체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을 듣는다. 내 경우 '호'였다. 생략된 듯, 아닌 듯한 그의 문체에 매료되기는 상당히 쉽다. 연약한 것을 향한 책이라 내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렸던 것일까. 빌려 읽었지만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두고두고 흰 것들을 곁에 두고 싶어진다. 

 

2017년 3월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