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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시집 리뷰

by 칠월색 2020. 1. 13.

서정시는 작가가 자신의 감동과 정서를 주관적으로 읊은 시이다. 정호승의 시는 서정시이고, 낭만시이다. 정호승의 시를 가사로 안치환이라는 가수가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앨범을 발표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종종 들으시는 노래인 수선화에게의 가사가 정호승의 시였다. 우리가 교과서나 여러 매체에서 자주 보는 시는 주로 서정시이다. 그렇다면 서정시는 이전에 에세이를 쓴 다른 시인의 시와 비교했을 때 더 친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외로 정호승 시인의 시는 한자가 없다뿐이지 어려웠고 난해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대표작 격의 시집을 읽으며 느낀 몇 가지 특징을 꼽아본다. “겨울밤에서 호두나무여/망치를 들고/나를 다시 내리쳐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뒤집힌 비유를 종종 사용한다. 그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섬찟함을 느꼈다. 같은 감정을 "밥 먹는 법"에서 "그래도 배가 고프면/입을 없앨 것"이라고 할 때도, “개미에서 개미들이 일제히 칼끝을 치켜세우고/자기의 목을 찌른다.”라는 마지막 두 행을 읽을 때도 느꼈다. 마지막 두세 행에서 충격을 주는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약간 미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고 격한 표현들이다.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마음의 똥을 읽으면서 더러운 표현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황지우 시인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 시집을 읽다가 그리운 미친년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아니 대체 무엇을 그리운 미친년으로 부르는가 하고 제목을 그제서야 읽고는 유관순 열사를 비유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시집을 읽다 혼혈아에게를 읽고 정호승 시인의 몇몇 시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려고 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의 예수”, “구두닦는 소년”,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등을 읽으며 정호승 시인이 소외 계층을 시에서 많이 언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을 일기”, “눈사람을 읽으며 그를 강조하기 위해 성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련한 표현들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산낙지의 죽음(“산낙지를 위하여 ) 목 잘린 돌부처들(“소년 부처 ), 무료 영정 사진을 찍고 더 이상 준비해야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파고다 공원 )를 통해 묘한 죽음의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산낙지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고 꿈틀대고,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의 목이 잘렸다고 말한다. 무료 영정 사진을 찍은 아버지는 열심히 양념통닭만 잡수신다. 죽음 앞에서도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나라한 현실이다.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당연한 현실이다. 정호승 시인의 정서는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기에 더 난해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정호승 시인은 이 외에도 반복을 좋아하는 시인이다. 정호승 시인 외의 많은 시인도 반복을 활용하고 있다만 허허바다 소년 부처”, “햇살 속으로와 같이 책의 양옆에 맞닿아 연결된 시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내가 특히 인상깊다고 생각한 시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는 시 안에서 반복을 많이 사용한다. 두 연이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각 연 안에서도 그늘 눈물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 시는 동명의 시집 안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는 시이다.

세상에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고, 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그늘을 가지고 있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1 2행의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로도 받아들여진다. 자신 안의 그늘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 내 안의 그늘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의 역할을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과정을 최근에 겪었다. 이전의 나는 내 안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했다.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이 옳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면 내 안의 그늘은 그늘 속에도 자리하지 못하고 곪게 된다. 햇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것이고,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 안의 그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을 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다. 힘든 시기는 교훈을 주고, 앞으로 견디며 살아야 할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 슬픔과 분노는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힘이 들지만, 그것을 쏟아내고 나면 카타르시스를 준다.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낸 나에게 이 시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알려주며 특별하게 다가왔다.

2연의 눈물 그늘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눈물을 아는 사람은 남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화자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한다. 화자가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는 아니지만, 화자의 그늘과 눈물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화자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수 있다고 보면 화자가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는 화자라면 눈물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화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과 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 나도 화자와 같이 나의 그늘과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같이 나무 그늘에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 내 이상형이 나와 비슷한 사람, 말 잘 통하는 사람이었던 이유를 시를 통해 찾았다.

이 시는 슬픔의 기쁨과 그늘의 밝음이라는 당연한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면서 그늘과 눈물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모두 시를 읽고 공감하고, 시를 읽고 부정적인 것의 긍정적인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마음에 울림을 주며 인상 깊게 전달하기에 이 시는 뛰어난 시라고 생각한다

 

2018년 3월에 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시를 전문 인용한 것을 삭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