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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 - SF 허스토리 앤솔로지 리뷰

by 칠월색 2020. 1. 13.

SF 단편집을 좋아하는 나로서 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단편과 장편 소설을 발표한 작가들이 낸 앤솔로지였다. 작가진은 공개하면서 각 소설을 어떤 작가가 썼는지는 공개하지 않는 방식이 신기했다. '이건 분명히 이 작가가 썼을 거야'라고 추측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북토크에서 공개한다고 하니, 그때 가면 알 수 있을 거 같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여태까지 한국 작가의 SF를 선호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작품에서의 많은 이야기, 예를 들면 화성에서까지 엄마들이 놀이터에서 아이의 교육을 이야기하고 공인인증서를 붙잡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 기업의 장애인 복지가 순전히 복지 차원이 아닌 일반인에게 적용되기 이전의 테스트로 진행되는 이야기, 의뢰인이 누구든 자본의 선호 방향으로 호르몬까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서 보이는 하이퍼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풍자의 민족'이라는 표현을 증명하듯, 현 사회의 면면을 여실히 드러냄으로써 독자가 비판의 시선으로 보게끔 한다. SF가 비판에 적합한 장르임은 이미 충분히 추측 가능했는데, 그를 또 한 번 증명해주는 책이었다.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바뀐 세계관보다는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견뎌내는지를 주로 그려낸다. '견뎌낸다'는 표현이 적합해 보이는 삶을 바라보면서, 또 그 삶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읽었다.

깨달음이 있고 비판이 있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풍자라는 단어에 재미와 비판이 동시에 담겨있듯 이 책 또한 그렇다. SF 특유의 냉소 섞인 웃음을 좋아하는데, 그 점에서 이 책은 소위 '찐 SF'스러웠다. 어렵지 않고 재밌게 술술 읽힌다는 점과 불편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고 그것이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작품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 마지막에 부록으로 추천하는 작품들을 보며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읽을 책이 늘어가고 있다!

 

이상은 2019년 5월 3일에 쓴 글이다. 그 이후 북토크에서 어느 작가가 무엇을 썼고, 그 뒷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북토크에는 처음 가 봤는데, 내가 읽은 글을 쓴 작가를 직접 만나서 가까이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 책만 열심히 읽던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큰 선물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조금 휘발되어서 아쉽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같이 모여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