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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직은 신이 아니야 - 듀나 연작 소설집 리뷰

by 칠월색 2020. 2. 29.

이전에 '민트의 세계'를 읽었다. '아직은 신이 아니야'보다 이후에 나온 책인데, 순서를 바꿔 읽은 셈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세계관을 아는 상태에서 소설집을 읽은 셈이라 더 이해가 편했다. 

소설집의 모든 소설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데, 그 세계관이 창작 세계관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전까지는 일부러 공통 주제를 갖고 다양한 작가가 모여서 쓴 소설집이 아닌 이상 소설집 안에 있는 소설이 공통적인 특징을 대놓고 갖고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소설집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듀나의 세계관은 특별하다고 느꼈다.

우선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이전에 읽은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에서 듀나가 언급했듯이 이는 장르물, SF에서 흔하지 않은 시도다. 본인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시도했고, 나는 이것이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임에도 서구권의 문화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 한국엔 분명히 있고,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동양인이 매체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는 기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면 그런 이상한 차별에서 벗어나기 쉽다. 한글로 쓰인 책이니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데도 SF에서는 왜인지 그렇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SF 작가들이 SF를 접할 때, 그 배경이 서구권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한국을 배경으로 했을 때의 장점 중 하나는 한국에서 특징적으로 다뤄지는 클리셰나, 한국 독자들이 한국적이라고 느끼는 요소를 넣어 재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최근에 한국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점인데, 한국 작품에는 꼭 대기업의 횡포나, 정치인의 비리, 부자의 갑질 등이 한 번쯤은 들어가 주곤 한다. 특히 영화는 대기업에서 제작에 기여할 텐데도 그렇다. 이는 한국 사회의 면모를 반영하여 소비자들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기 쉽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신이 아니야" 중 "나비의 집"에서도 대기업이 언급된다. 특히나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특징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말한 한국 작품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LK 실험 고등학교 살인 사건"이나, "루카스 에크보리 정신 개조 캠프" 등에는 한국의 교육열이나 학생들의 삶이 잘 녹아들어 있었다. 역시나 한국 작품에 자주 쓰이는 주제이지만, 이런 특징이 SF 세계관과 결합한 것은 흔하지 않고, 그래서 더욱 재밌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도 좋았지만, 세계관 자체도 아주 흥미롭다. 갑자기 생긴 염동력자와 정신감응자, 그리고 그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배터리. 배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희귀하기 때문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배터리가 있어야만 다른 초능력자들이 좀 "쓸만한" 능력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묘하게 밸런스가 맞아서 소설 외에 다른 매체(영화나 게임 등)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 또한 인상적이다. 일반적인 단편집이나 소설집에서는 수록된 소설 중 하나의 제목을 따서 책 제목을 짓는 경우가 많다. 곽재식 작가님의 후기를 읽어보니, 그 제목을 작가 자신이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책 안에는 "아직은 신이 아니야"라는 소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연작 그 자체가 새로운 이름을 받은 것이다. 그 이름도 도발적이라고 느꼈다. '아직은' 신이 아니라는 것은, 곧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이 세계관에서의 인간들은 원리를 몰라도 갑자기 생긴 능력을 어떻게든 다루면서 발전을 이뤘다. 그 중간에 각종 사건사고가 터지고, 그것이 소설로 다뤄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초능력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우월감을 느낀다. 그것이 내가 곧 신이 될 것이라는 자만심으로 표출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신이 아니기에, 사실은 신이 될 수는 없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보기엔 재밌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