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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씨앗 - 정도경 작품집 리뷰

by 칠월색 2020. 1. 27.

정도경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포트폴리오 카드 텀블벅 프로젝트(https://tumblbug.com/sfwuk01)로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찾아보니 놀랍게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작가 중에는 정도경 작가가 없다. 찾아보니 본명으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http://sfwuk.org/)의 운영위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후원하면서 받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자료집에서 작가님을 발견하고 책을 찾아봤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 기억이 확실하지 않냐면 벌써 이삼 년은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학교 도서관으로 신청해뒀다가 잊은 책을 2주 전에 도서관에 들렀을 때 내 도서 신청 리스트에서 발견하고, 도서관 탐방을 하며 다시 꺼내 보았다. 도서관 탐방을 하면서 내가 읽을 책이 아직 도서관에 많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 소속된 작가의 책이지만 SF라고 분류할 수 있는 소설이 많지는 않다. 오히려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소설이 많다. 이것은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이 환상문학웹진 거울(http://mirrorzine.kr/)에 게재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이라고 하면 내가 즐겨 읽는 작품의 작가님인 곽재식 작가님이 떠오른다. 곽재식 작가도 SF 작가로 유명하지만, SF라고 분류되지 않을 소설을 많이 쓴다.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열두 편의 비슷한 길이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단편집을 많이 읽어봤지만 이렇게 많은 단편이 한 권에 있는 데다가, 단편 각각의 길이가 이렇게 비슷한 단편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책 마지막에 수록된 해설에서 정세랑 작가가 말했듯이, 단편들의 차이가 미세해서 별로 상관이 없을 만큼 근사하다. 단편 중에 무엇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각 단편이 인상적이었다. 제일 인상 깊은 단편을 꼽을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씩 짧은 감상을 해보려고 한다.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3부작은 판타지 소설이다. 로맨스 판타지의 클리셰를 깨부수고, 여성 인물을 더 입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좋았다. 유모 캐릭터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였고, 보통 이런 역할은 유모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새로웠다. 높은 탑의 공주가 나오는 소설 중에 클리셰를 비틀려고 하는 소설은 많았지만, 이 소설만큼 색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읽을수록 전혀 예상도 못 한 경로로 가는 이야기를 따라잡느라 더 어떤 감상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다. 

"사막의 빛"의 배경은 중앙아시아와 비슷하다. 최근에 PBP TRPG(Post-by-post tabletop role playing game, 게시판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임이다)를 시도해보고 있는데, 그 배경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마지막 작가의 후기에서 깨닫는 점이 있는데, 그 부분이 재미있다. 평화롭기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서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나서 좋았다. 

"씨앗"은 평소에 종종 접하던 이슈와 깊게 맞닿아있다. 대기업이 농업의 중심이 되면서 생긴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대기업이 만들어낸 일회용 씨앗을 사서 농사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상황에서 조금만 더 미래로 가서 문제를 조명한 것이 이 소설이다. 이미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을 판타지를 통해 풀어나간 점이 재미있고, 원래도 인간과 인간 외적인 것의 혼합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느끼던 터라 재미있게 읽었다. 

"참기름"은 한국 괴담과 맞닿아있다. 웹에 떠돌아다니는 괴담을 재미있게 읽는 편이라 이 소설도 한국 동화를 읽듯이, 그리고 그런 괴담을 읽듯이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진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게 괴담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최근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선을 읽고 있는데 비슷한 느낌이 든다. 괴담이란 것은 배경을 막론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공포를 주는 요소가 들어가는 걸까 싶다. 

"완전한 행복"은 소위 '사이다'를 주는 소설이다. '사이다'가 유행하기 전에는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해피 엔딩을 주기 위해 가해자가 용서를 빌고 피해자가 용서하는 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새 시대 배경과 맞지 않는다. 가해자는 용서를 빌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한다. 이 상황을 비판하며 "완전한 행복"은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고, 가해자를 벌하는 '사이다'를 준다. 하지만 요새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이다'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피해자가 강렬하고 통쾌한 복수를 하기를 바라기만 한다. 현실에서도, 작품에서도. 그런 상황을 고려해 좀 더 현실적인 제3의 방법이 나오는 작품이 생기는 추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약간 불만족을 느꼈다.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이다'가 유행하기 전에 쓴 소설인 것으로 보였고, 소설 중에 이렇게 강렬하게 복수하는 소설이 많지 않아서 넘어가기로 한다.

"그림자 아래"는 소재가 신기했다. 게다가 묘사도 좋고, 기승전결도 깔끔하다. 반전도 있다. 정말 깔끔하게 완결된 단편이라 좋았다. 그래도 이 소재로 다른 작품이 나와도 재밌을 것 같다. 정세랑 작가의 해설에서 또 공감한 부분이 있는데, 정도경 작가의 소설은 읽으면 머릿속에서 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원래도 책을 읽으면 그렇게 장면을 상상해가며 읽지만, 정도경 작가의 소설, 특히 "그림자 아래"를 읽을 땐 더 선명하게 영상이 떠올랐다. 짧게 영상화가 되어도 재밌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애니메이션이 잘 어울릴 것 같다. 팔 한쪽의 그림자가 없어진 채 어둠을 걸으며 팔만 희뿌옇게 빛나는 주인공을 상상해보면 그렇다. 

"금"은 몇 안 되는 SF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미래를 오가는 주인공이지만 마음가짐은 흔한 현대인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결말에서 개연성 관점에서 보면 약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주인공의 감정선은 납득이 갔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끔 생각해보는 편인데, 내 생각을 강화해주는 편의 소설이었다. 

"꿈"은 현대 한국 드라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작가가 치정극을 잘 쓴다고 한 의미를 알겠다고 느꼈다. 정말 꿈 같은 느낌의 소설이다. 

"영생불사 연구소"는 회사 배경의 소설이다. 곽재식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은 나로서는 그 느낌도 든다고 느꼈다. 곽재식 작가가 회사 배경으로 정말 답답한 느낌이 나는 소설을 잘 쓰기 때문이다. 곽재식 작가의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좀 더 치정극과 현대 한국 드라마 같은 느낌이 가미된 점을 꼽겠다. 그런데 80%는 실화라고 해서 정말 놀랐다. 역시 소설보다 현실이 더 놀라울 때가 많다. 

"한 번 사는 인생"은 모텔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흔히 보기 힘든 배경이다. 게다가 모텔이 SF, 혹은 판타지다운 면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소설을 다 읽고 제목을 보니 '한 번 사는 인생, 되는대로 즐기면서 살자!' 같은 의미로 모텔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내용을 다시 곱씹어보면 등장인물은 별로 되는대로 즐기면서 살지 못하는 것 같다. 원래 인생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든다. 

치정극에 가까운, 혹은 드라마에 가까운 소설을 별로 접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접해보게 되었다. 요새 읽는 책은 정통 문학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책이 많다. 좀 더 가볍고 잘 읽히고 자극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얻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닌 데다가, 취미생활인데 뭐 어떻든 상관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너무 자극적인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기에 약간 안 맞는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읽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재미를 가진 책 아닐까. 취향이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재미있어서 계속 읽게 되는 중독성 강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