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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부드러운 뿔 - 조우리, 소우경 그래픽 노블 리뷰

by 칠월색 2020. 1. 20.

기숙사 방으로 들어갈 때면 나를 위한 건 없을 줄 알면서도 택배가 쌓여있는 곳에 눈길을 준다. 시선은 여김 없이 쌓인 택배를 스쳤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사감실을 지나쳐 곧장 걸어가다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우편함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왔기 때문이다. 근거는 없었다. 눈을 굴리며 방 호수를 찾다가 내 방 호수가 적혔을 칸에 눈이 고정됐다. 노랗고 커다란 봉투가 우편함 밖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룸메 언니한테 온 거겠지, 전해줄 요량으로 봉투 가까이에 다가갔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또박또박한 손글씨로. 출판.. 정원? 아니구나. 출판정언에서 보내온 것이다. 책이겠구나, 내가 책을 받을 일이 있었던가. 보통 이렇게 등기나 우편으로 오는 것은 텀블벅에서 후원한 책이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젠더 블라인드 소설을 후원했었지. 방에 들어와 휴식을 마친 나는 잠시 책상 위에 뜯지 않은 채로 놓여 있던 봉투를 칼로 조심히 잘랐다. 봉투에 비해 작고 귀여운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글씨체도, 삽화도 투박한 듯하면서 귀여웠다. 영문 제목이 인상 깊었다. "Same room, Same journal and Every humble lyrics" 어떤 내용을 담았을지 기대가 됐다. 

첫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난해했다. 우울증이 심한 내가 쓰던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것보다도 중구난방했다. 일기 아닌 일기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글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이공계의 느낌이 났다. 누가 아빠의 빈자리를 그렇게 표현하겠는가.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글은 서문이었다. 이 글을 1부라고 하고 뒷부분의 그래픽 노블을 2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픽 노블로 넘어가자, 내용이 이해가 잘 되는 동시에 서문의 난해함이 없어졌단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그래도 특유의 추상적 표현은 남아 있어 좋았다. 삽화와 글이 잘 어울렸다. 방 안에 나타난 까만 물감이 마음의 섬이 되어 남았다는 표현과, 그 삽화가 제일 인상 깊었다. 주인공과 '302호 누나'가 참 좋았다. 주인공 아이의 상상력과 순수함이 좋았다. 부드러운 뿔이 은유하는 것이 좋았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많이 사 모았다. 그 중 이 책은 제일 부드럽고, 동시에 단단하다. 마치 부드러운 뿔처럼. 

2018년 9월에 씀.